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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틈새/귀물일기

첫 장을 열며 — 잉크로 쓰는 경계의 기록

by isnmm 2025. 4. 24.

 

그것들은 본래, 이곳의 것이 아니었다.

바람 속에서 속삭이던 것,
논두렁에 잠깐 스쳤다 사라진 그림자,
사람들은 그저 헛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우리는 오래도록 그들과 이 땅 사이의 경계를 지켜왔다.

때로는 짙어지고, 때로는 옅어지고,
그러나 언제나 두 세계는 서로의 법칙을 침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해 전,
한 번의 충격이 그 흐름을 비틀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사람의 욕심 때문이라 말했고,
누군가는 무명한 요괴가 일부러 경계를 찢고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저 그 순간이 왔다고 믿었다.

 

그때부터다.
이 땅에 너무 낯선 울음소리,
곡식이 피기도 전에 시들어버리는 들판,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가 지나간 흔적이 남기 시작한 건.

 

 

내 이름은 백련.
하얀 연꽃처럼,
소리 없이 떠다니다
피지 못한 자를 다시 그 뿌리로 돌려보내는 자다.

나는 그것들을 귀물(鬼物)이라 부른다.
사람은 아니고, 짐승도 아니며,
때로는 그림자처럼 스치고
때로는 바람처럼 흔들리는 존재들.

이 일기는 내가 보낸 귀물들의 기록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역사로 남기기 위함도 아니다.

이건 내가 나를 잊지 않기 위한 기록이다.

잉크를 다시 묻힌다.
첫 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