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들은 본래, 이곳의 것이 아니었다.
바람 속에서 속삭이던 것,
논두렁에 잠깐 스쳤다 사라진 그림자,
사람들은 그저 헛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우리는 오래도록 그들과 이 땅 사이의 경계를 지켜왔다.
때로는 짙어지고, 때로는 옅어지고,
그러나 언제나 두 세계는 서로의 법칙을 침범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해 전,
한 번의 충격이 그 흐름을 비틀었다.
누군가는 그것이 사람의 욕심 때문이라 말했고,
누군가는 무명한 요괴가 일부러 경계를 찢고 나왔다고 했다.
나는, 그저 그 순간이 왔다고 믿었다.
그때부터다.
이 땅에 너무 낯선 울음소리,
곡식이 피기도 전에 시들어버리는 들판,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가 지나간 흔적이 남기 시작한 건.
내 이름은 백련.
하얀 연꽃처럼,
소리 없이 떠다니다
피지 못한 자를 다시 그 뿌리로 돌려보내는 자다.
나는 그것들을 귀물(鬼物)이라 부른다.
사람은 아니고, 짐승도 아니며,
때로는 그림자처럼 스치고
때로는 바람처럼 흔들리는 존재들.
이 일기는 내가 보낸 귀물들의 기록이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도,
역사로 남기기 위함도 아니다.
이건 내가 나를 잊지 않기 위한 기록이다.
—
잉크를 다시 묻힌다.
첫 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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