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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틈새8

귀물일기 – 두두리(上) 산길을 걸었다.신목은 타올랐고, 귀물도 함께 사라졌다.그 자리에 남은 건 작은 씨앗 하나.남겨진 그 조각은, 누군가의 품 안에 있다.그 조각은 그들의 마을에서 새로운 싹을 틔울 것이다. 걷다 보니 등 뒤에서,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가 따라오는 걸 느꼈다.발소리는 없었다.짐승도 아니었다.바람도, 낙엽도 아닌—아주 오래된 나무가 공중에서 흔들릴 때 나는 울림. 두두. 기척은 일정했고, 거리는 항상 같았다.내가 걸으면 따라오고,멈추면 함께 멈췄다.그 존재는 나를 ‘알아보려’ 애쓰는 것 같았다. “왜 따라오지.” 나는 뒤돌지 않고 물었다.그러자 기척이,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낮게 울렸다.“기억이, 걸어가니까.”“내가 있었던 데도,네가 가는 데도…멀진 않아.” “어디지.”“연못.오래 잠겨 있던 나무가 있었고,나는.. 2025. 5. 8.
귀물일기 : 삭귀(朔鬼) — 시드는 마을 (3) 사그라진 신목 앞. 타들어간 재 속에서 바람 한 줄기조차 불지 않았다. 모두가 침묵했다. 우는 자도 없었다. 고개를 떨군 무당들의 어깨에서 묻어나는 건 절망이라기보다, 허무였다. 나무와 함께 울던 이들조차, 눈물을 흘리지 못했다.연기 속에서 무언가가 흩날렸다. 아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무당들 중 몇 명의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이 흐려졌고, 마치 안에서 다른 무언가가 빠져나오는 듯한 낌새. 눈이 반쯤 감긴 채,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 곧이어 그들의 몸에서 기운이 스르륵 빠져나오듯 피어올랐다. 그건, 신들이었다. 지금껏 무당들의 몸을 빌려 세상에 발을 디뎠던 자들.그들은 말이 없었다. 흩날리는 연기 속에서 천천히 큰무당이 있는 방향으로 모여들었다.나는 붓을 .. 2025. 5. 4.
귀물일기 : 삭귀(朔鬼) — 시드는 마을 (2) 다시, 허공에 붓을 그었다. 검은 기운이 신목의 틈새를 비집고 더 짙게 피어올랐다. 나무의 몸통을 따라 뿌리로 번져가며, 내가 가한 봉인의 기운에 저항하는 그것은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공기가 무거워졌다. 땅 밑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더 깊숙이 웅크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손이 떨렸다. 붓 끝이 허공에 그어낸 획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안 돼요! 거기까진 안 됩니다!"누군가가 소리쳤다. 무당 중 하나였다. 내게 달려오려다 그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부적이 타들어가며 공중에서 재로 흩어졌다. "그 나무는… 우리 마을의 기둥이에요. 아무리 오염됐다 해도, 그걸 없애버리면…!"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붓을 거두지 않은 채, 신목을 바라보았다. 단단했던 나무껍질이 물러진 살처럼 부풀어 오.. 2025. 5. 2.
귀물일기 : 삭귀(朔鬼) — 시드는 마을 (1) 여명이 어스름히 깔릴 무렵, 나는 마을 광장에 조용히 발을 디뎠다. 며칠 동안 마을을 뒤덮었던 짙은 안개가 걷히고, 사람들의 흐릿했던 눈빛도 서서히 제 빛을 되찾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오…?" 중년의 사내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그 얼굴엔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작은 안도감이 뒤섞여 있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땅에 주저앉는 이들도, 허공을 향해 울부짖는 이들도 있었다. "내 아내는? 내 아이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게요!"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 속엔 두려움과 적의가 엉켜 있었다. "당신이 무슨 짓을 한 거요! 왜 우릴 이런 일에 끌어들인 거요!" 그가 거칠게 다가오려는 순간, 젊은 무당이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봉인의 방.. 2025. 4. 30.
귀물일기 : 겸의(謙儀) — 이름을 훔친 자 (2) 해가 떴는지조차 알 수 없는 흐린 빛이 집 안을 감싸고 있었다.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는 눅눅했고, 바람도 움직이지 않았다.낮이라 말하기엔 어둡고, 밤이라 하기엔 너무 잔잔했다.방 안의 기척은 사라지지 않은 채 고요히 움직이고 있었다.나는 마루 끝에 앉아 붓을 무릎에 올려두고 있었다.잉크는 잠잠했지만, 팔끝으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부인은 방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당신... 대체 누구신가요.”“길을 따라 걷는 사람입니다.”“왜 우리 집에 와서 이런 말을 하죠? 지금 이 시간에, 이 방을 왜 그렇게 바라보시죠?”“그 방에, 살아 있는 기척이 느껴졌습니다.”그녀는 눈을 피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그 말은 짧고 단정했지만, 그 안엔 무언가를 닫아걸려는 기색이 분명했다.“착각이라 하기.. 2025. 4. 27.
귀물일기 : 겸의(謙儀) — 이름을 훔친 자 (1) 이조를 만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달은 이지러졌고, 바람은 낮게 웅얼거렸다.나는 내 그림자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뒤를 걷고 있다는 감각을 떨칠 수 없었다.경계가 무너진 틈새로 이름 모를 존재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그 기척은 나를 연곡리로 이끌었다.연곡리는 언제나 조용한 마을이었다.안개가 먼저 움직이고, 상이 나도 곡소리조차 퍼지지 않는 곳.하지만 최근의 침묵은 이상했다.누군가를 보냈다는 흔적은 있는데, 울음도 없고 조문도 없었다.심지어 죽은 자의 그림자가 밤마다 창호를 어른거렸다는 소문도 있었다.나는 인사 없이 마을에 들어섰다.부름도 환영도 없었지만, 그 틈을 따라 걷게 된 것이 이유였다.해가 뜨기 전의 연곡리는 말이 없었다.대문마다 종이꽃이 바람 없이 늘어져 있었고,기와 아래 눌린 안개는 눅눅.. 2025. 4.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