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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틈새/귀물일기

귀물일기 : 겸의(謙儀) — 이름을 훔친 자 (2)

by isnmm 2025. 4. 27.

 



해가 떴는지조차 알 수 없는 흐린 빛이 집 안을 감싸고 있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는 눅눅했고, 바람도 움직이지 않았다.
낮이라 말하기엔 어둡고, 밤이라 하기엔 너무 잔잔했다.
방 안의 기척은 사라지지 않은 채 고요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마루 끝에 앉아 붓을 무릎에 올려두고 있었다.
잉크는 잠잠했지만, 팔끝으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부인은 방문 앞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 대체 누구신가요.”

“길을 따라 걷는 사람입니다.”

“왜 우리 집에 와서 이런 말을 하죠? 지금 이 시간에, 이 방을 왜 그렇게 바라보시죠?”

“그 방에, 살아 있는 기척이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눈을 피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말은 짧고 단정했지만, 그 안엔 무언가를 닫아걸려는 기색이 분명했다.

“착각이라 하기엔, 너무 분명합니다.”

부인은 한참 말이 없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젯밤, 그리운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목소리였습니까.”

“익숙했어요. 아주 많이.”

나는 말없이 붓을 손에 쥐었다.
잉크가 아주 작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이가…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떨궜다.

“당신의 부군이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만약 돌아온 것이 있다면, 그저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림자…? 그럼 그게 정말 그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요?”
부인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며, 한껏 애절해졌다.
“그인데... 분명히 그인데... 왜...”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믿을 뿐.”
나는 깊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죽은 이는 죽은 이의 길을 가야하고, 산 자는 살아야 해요.”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눈물은 없었지만, 그 눈빛은 결단을 내리려는 듯 강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말 없이 문고리를 쥐었다.

“이 방은 열 수 없어요. 그이는… 아직 여기에 있어요.”

“그 분은... 없습니다.”
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죽은 이의 자리는, 없어야 해요.”

그녀는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문고리를 다시 움켜잡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눈빛에선 이미 결정이 내려진 듯한 강렬함이 느껴졌다.

나는 문고리를 놓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분은 이미 떠났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그는 앞을 보고 있었고,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그의 웃음은 표정이었지,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바닥에 원을 그리고 잉크를 떨어뜨렸다.
그림자가 그 위에 천천히 얹혔다.

“당신의 이름을 말하라.”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붓끝을 살짝 들어 원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잉크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까지 온 이름이라면, 스스로 말할 수 있겠지.”

그 순간,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들이 먼저 날 원했다.
기억은 자리를 만들고, 자리는 존재를 불러.
나는 그리움이었어.”

“너는 그저 그리움을 흉내 낸, 잊힌 탈일 뿐이다.”

그는 그 말을 듣고도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의 형상이 무너졌다.
겹겹이 씌워진 얼굴들이 갈라졌고, 노인, 아이, 울던 여인, 웃던 남자의 얼굴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다 마침내, 입술을 떨며 중얼였다.

“…겸의(謙儀).”

붓이 마지막 선을 그었다.
겸의는 안개처럼 흩어졌다.

방 안은 본래의 것대로 비워졌다.

마루 끝,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인 채 조용히 울고 있었다. 길고, 깊고, 꺼내지 못했던 울음이었다.